[essay] 천막교사로 돌아온 중학생
[essay] 천막교사로 돌아온 중학생
  • 김청 수필가
  • 승인 2019.09.05 15:27
  • 호수 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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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가드닝 77호=2019년09월] 새로 지은 집 마당 밟아주겠다며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중학교 동창생들이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별장도 아니고 전원주택도 아닌데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큰 뉴스가 되나 보다. 동네 속에 있던 옛터 그 자리이건만 종심의 나이에 고향에 지었으니 화제가 될 만 했을게다. 중학교 시절 옛날 집에 다녀갔던 친구 들이 더러 있어 당시 이야기를 기억해내는 친구도 있었다. 실은 가족들이 집짓기를 반대하여 오랜 설득 끝에 집을 다시 짓게 되어 마음이 불편했으나 친구들이 잘했다고 용기 북돋아주니 다행이었다. 밤새도록 이야기로 온통 열을 받아 집이 불타기라도 할 듯 후끈거렸다. 친구들을 만나면 옛 학창시절로 되돌아가 삶의 즐거운 활력을 안겨주곤 한다. 정다운 친구들이 멀리서 찾아와주니 이 아니 반가운가!


한밤 자고난 다음 날 아침 동네 마을을 돌아보고는 옛 중학교를 찾아보자고 하여 길을 나섰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세월만 날려 보낸 채 한 번도 찾아가 본적이 없다.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함께 뛰놀던 동창생들과 같이 가니 마음 부터 설레었다.  약 4~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중학교를 걸어 다녔다. 중학생으로는 먼 길이었기에 추운 계절에는 힘들었지만 오고 가면서 즐거운 일도 많았다. 학교 길에 배가 고프면 들판에 심어진 무, 가지 등을 주인 모르게 캐서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어쩌다 친구와 말티고개에서 사먹던 풀빵은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하지만 어머니가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멀리 옹기장사라도 갈랴 치면 손수 밥해 먹고 다녀야하는 고달픔도 감내해야 했다. 남편 없이 홀로 살림을 꾸려 가신 어머님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건만. 이제 보니 그 시절도 그립다.


50여 년 전, 흘러간 학창시절 추억을 만지기 위해 졸업 후 처음으로 교문에 들어섰다. 완전히 달라진 교정이지만 가슴이 벅차오르며 모두가 두 눈에 고이는 눈물을 닦는 듯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이제 종심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인생의 허무와 무상함을 실감할 따름이었다. 뛰노는 학생, 운동하는 학생 하나 없는 한적한 운동장은 적막했다. 그렇게 크고 넓던 운동장이 아주 작고 좁았다. 부름천까지 가서 책보에 가득히 돌을 담아 날라 만들었던 재갈길도, 고슴도치 선생이 음악을 가르쳤던 음악실도, 사계절 공부했던 천막 가교사도 보이지 않았다. 점심 나눠먹던 뽕나무밭 의 그 나지막한 언덕길의 황토밭도, 그리고 배구장에 걸려 있던 배구네트도, 정구장의 낮은 네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교사 뒤쪽 언덕배기에 있던 소나무만 허리가 굽어 진 채 교정을 지키면서 고목이 되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 반 친구 김수복 군과 황수용 군의 공개 격투기가 눈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심판은 친구들이고, 승부가 나지 않으면 몇 날이고 반복했다. 본인들은 아마 기억하지도 못하겠지. 산토끼 잡는 몰이꾼으로 자주 동원되었던 무량산이 저쪽에 앉아있다.


천막 지붕이었던 가교사는 큰 비나 태풍이라도 몰아지면 수업을 할 수 없어 교무실이나 안전한 건물에서 합반을 했다. 언덕배기 비탈에 자갈길 사이로 쭉 늘어지게 배치되었던 여러 채의 천막교사는 이제 흔적이 없고 깨끗한 하양 현대식 3층 건물이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한규필 선생님 이 지나가다가도 학생들 머리를 툭 치며 ‘만주의 5대 농산 물?’ 하면 ‘콩, 수수, 조, 옥수수, 밀’, ‘독일의 외교 3B 정책?’ 하면 ‘베를린, 비잔틴, 박다드’ 등으로 크게 소리 내어 토해내곤 했다.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양문석 음악선생님의 ‘오 나의 태 양’의 ‘솔파미레도 도레미도시라라……’를 외워야 했고, 외우지 못하면 대나무 뿌리로 만든 회초리로 손바닥을 얻어 맞았다. 그랬기에 그 음계는 지금도 외울 수 있다. 이엄수 선생님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해석하지 못하면 간이변소에 가서 똥 묻혀오기를 시켰다. 남성중의 남성이었던 김호수 선생님, 실력이 짧다고 평가들 했지만 잘 넘겨가며 영어를 가르치셨던 이광범 선생님, 초한지, 한신장군과 유방에 관한 일사천리식 역사 이야기를 허리가 비뚤어져 가면서 이야기하시던 김언호 선생님, 교지에 싣겠다며 나더러 뜻도 모르는 소설을 써 오라시던 권만현 국어선생님, 실력가로 알려졌다가 진주중학교로 전근하여 아쉬워했던 김영백 영어선생님, 항상 불만에 가득 차 튀어 스프링이라 별명 붙은 박장희 선생님 등이 이름 석 자 그대로 생생하다.


졸업을 앞두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동맹 휴학이라 하여 모두 교실을 빠져나갔다. 급한 지령에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가교사의 창문을 뛰어넘어 빠져나간 일이 있었다. 교실의 출입문이 교무실과 마주 보여 부득이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뒷날 스프링 선생에게 호출을 받아 교무실로 불려갔다. 창문을 넘어가는 모습을 기억 했던 것이다. 몇몇 친구들도 불려와 있었다. ‘엎드려 뻗혀, 공부 좀 한다는 놈이 뺑소니를 해!’하며 나무 몽둥이로 무지하게 얻어맞았다. 온갖 욕설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의 동맹 결석으로 개근상도 놓쳤다.


일학년 영어 교과서는 고! 스톱! 으로 시작했지만, 나는 입학할 때 알파벳도 쓰지 못했다. 읍에 사는 최덕보, 김광열 등 친구들이 영어책을 줄줄 읽어대는 데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비 오는 날 합반을 했고, 그 영어시간 때 장난치다 중요한 내용을 듣지 못해 수업이 깜깜해져 버렸다. 그 후 진도가 말이 아니었다. 결국 방학을 이용하여 고등학생인 사촌 형님에게 간청하여 동네 친구들과 함께 영어지도를 받았다. 인기가 있었던 삼위일체, 소야영문법, 고교영문법 등을 교재로 하여 집중 공부를 했다. 개학 후에 는 쑥쑥 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특별 과외를 받은 덕분이었다. 성장하면서 고교, 대학 진학, 가정교사나 영문법 강의 도 할 수 있었던 기초를 그때 닦은 셈이 되었다, 성호 형님이 감사하고 늘 그립다.


그 선생님들은 지금 얼마나 생존하시고 어떻게 생활하고 계실까? 너무 세월을 잊고 세상만을 살아왔나보다. 인생은 짧고 세상은 무상하니 뜯고 찢고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며 당시 유행했던 졸업기념사인지에 의미도 잘모른 채 장난끼로 써주었는데 누군가 지금도 나의 글을 갖고 나 있을까? 나의 오늘은 어떤가? 어린 학창시절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르며 먼먼 모습으로 남아 영상으로 스쳐갔다. 교가가 머릿속으로 울려 퍼진다. 오십년도 넘었는데 유치환 작사의 가사가 거의 잊지 않고 입으로 토해 나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옛 이름도 고울세라 고자미동국 울울한 반만년의 겨레의 꿈이 잇고 이어 아득히 여기 머물러 자라노니 어진 슬기 맑 은 이목들 자랑은 높으고저 뜻은 멀 고저 한결같이 뻗어 날 고중 사나이.’ 누군가 선창을 하자 모두가 생각나는 듯 더 듬더듬 따라서 합창을 시작했다. Boys, be ambitious! 뇌 이던 소년들이 빈 몸으로, 백발과 주름살로 뒤덮인 노인들이 되었다니. 모두들 감개무량하다. 천막 가교사나 자갈길 등 옛 교정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지만 깨끗한 새 교사와 오래된 화단의 수목에 감싸이며 정다웠던 흘러간 세월을 손꼽아 본다. 아스라한 학창시절의 추억에 취해 눈을 지그 시 감았다. 머릿속 스쳐가는 필름을 더듬으며 추억으로 가 득 찬 기념사진도 찍었다. 엄마 품 같은 교정의 이곳저곳이 발목을 잡는다. ‘등 굽은 소나무 말없이 손 내밀며 언제 왔느냐고 왜 이제 왔느냐고 돌아서니 좀 더 있다 가라고 하네…….’ 중암이 시 한수를 읊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학교를 나와 갈모봉 삼림욕장에 들러 정상 가까이까지 걸어 삼림욕을 하며 세월에 지친 몸과 마음을 씻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상 살면서 쌓이고 쌓여온 마음의 때까지 씻어 청소하니 전신이 가볍고 시원하다. 그 시절을 반 추하며 동창생들과 웃음보를 터트리니 산울림이 메아리쳐 들려준다.


“그만하면 잘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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