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준비된 계절
[Letter] 준비된 계절
  • 전영호 집필위원
  • 승인 2019.11.01 11:29
  • 호수 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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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지금껏 보았던 주변 풍경을 한번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보세요. 그렇다면 아마 제가 느낀 것처럼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느낌으로 보내는 늦가을의 마지막 속삭임을 들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햇살이 닿은 잎사귀를 볼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들이 밀려 올라옵니다. 그것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슬픔인지, 하늘로 산화하는 절규인지, 소리 없이 번져오는 아득함인지 그렇게 잘 매김이 되지 않는 감정들입니다.

오늘, 겨울비 오는 이날에 십수 년을 같이 한 동료가 회사를 떠나는 이 착잡하고 복잡한 날에 깨달음처럼 정리가 됩니다. 세상에는 모양새와 현란한 색상을 자랑하는 단풍들도 많지만 사실 단풍(물드는 것)들은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아름답습니다.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은 비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봄, 여름의 힘찬 기운과 색의 농염, 비바람과 가뭄의 시련과 슬픔, 쓰라림까지 모두 겪고 나서, 이제 힘을 빼고 물기도 빼고 잎도 엷어져 햇살을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윽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도 아름다워지려면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어느 만큼 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 그런 가을입니다.
-이동협의 <정원소요> 중에서”

어느덧 11월입니다. 며칠이 지나면 아마 가을이라는 표현보다 겨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를 정도로 날씨가 쌀쌀합니다. 이른 아침에는 제법 서릿발이 서 있습니다. 서리꽃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가끔 꽤 괜찮은 광경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주변의 식물들은 근 1년 동안 고생한 힘이 싹 빠지듯 생기를 잃어 갑니다. 쓸쓸하긴 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죠. 점점 추워지는 날씨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것 같지만, 지금 시기에는 정말 중요한 정원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바로 추식구근 심기입니다.

10월 말이 되면 튤립과 알리움, 수선화와 같은 추식구근 들을 심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그냥 심기만 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죠. 하지만 작은 것 하나하나부터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구근의 생육 특성을 파악하고 비슷한 시기의 꽃을 피우는 구근들을 추려냅니다. 그리고 그 추려낸 구근의 색상과 키 등을 고려하여 색배합을 합니다. 또 심을 장소의 평소의 일조량을 확인하여 그늘 지역과 양지지역에 심을 구근을 재배치합니다.

그렇게 사전작업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구근을 심다 보면 그걸 지켜보는 관람객들은 자주 말을 걸어옵니다. “뭘 심으시는 거예요?”, “마늘인가요? 양파인가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튤립 알뿌리입니다.”라는 대답이 떨어지게 무섭게 돌아오는 말은 “이걸 지금 심나요? 지금 심으면 안 얼어 죽나요?”라는 질문이죠. 정답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지금 심어야 합니다. 안 얼어 죽습니다.”입니다.

정원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이 아니면 자연스럽게 가질 의문점인 것 같습니다. 먼저 구근(球根)이라는 식물은 공 구(球), 뿌리 근(根) 이라는 한자 그대로 알뿌리를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마늘, 양파 등도 구근 식물에 속하는 것이죠. 이러한 구근 안에는 필요한 영양분, 수분 등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물과 햇빛만 어느 정도 공급이 되면 구근 안에 저장된 영양분만으로 몇 달간 휴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근 식물도 추식구근과 춘식구근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튤립, 알리움, 수선화, 프리지아, 무스카리 등과 같이 가을에 심어야 하는 추식구근과 아마릴리스, 다알리아, 칸나, 글라디올러스 등처럼 봄에 심어야 하는 구근을 춘식구근 이라고 합니다.

추식구근은 내한성이 강하고 저온으로 인하여 꽃눈이 형성되는 구근을 일컫고 춘식구근은 내한성이 약하고 꽃눈 형성이 늦어지는 것을 춘식구근이라고 합니다. 튤립과 같은 추식구근들은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겪어야 화아분화가 이루어져 이듬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관람객들에게 설명해 드리면 그제야 아~ 하고 궁금증을 해소하고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가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가끔 한 개씩 두 개씩 달라는 관람객들을 마주할 때는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름 정도를 정신없이 심는 걸 끝마치고 나서 안도와 그간의 고생을 한숨으로 내쉴 때 즈음에는 꼭 한 번씩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야생동물피해입니다.

봄과 여름철 꽃들을 괴롭히는 동물이 고라니라면 겨울에는 멧돼지가 이따금 내려와 고생해서 심어놓은 화단을 뒤엎어 놓고 갑니다. 대체할 만한 구근이 남아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정말 막막할 때도 있었습니다. 고라니,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겠지만 올해는 정말 안 왔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수목원 늦가을 풍경 속에는 다른 계절과 비교했을 때 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예전에 모르고 거닐었던 길이 꽤 운치 있게 느껴지는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5분여 걸으면 당도할 수 있던 다른 정원으로 가는 길이 10분, 20분 걷고서야 도달할 때도 있습니다.

늦가을 단풍이 지나가서인지 낙상홍과 주목의 빨간 열매는 유독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열매를 찾아 움직이는 새들의 분주함이 더욱더 활기차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잣나무의 녹색은 변함없이 푸르르고 겨울이 오기 전 억새들은 휘날리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아련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죠. 수목원에 처음 입사했을 때 수목원은 다른 곳보다 유난히 추위가 빨리 오고, 스산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느끼던 그 감정이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보다 더 활기찬 봄을 맞이하기 위해 조금 더 일찍 잠드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동안 심심찮게 보이며 특히 어린아이들의 친구들이 되어주는 청설모와 다람쥐도 어디선가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겨울잠을 청할 준비를 할 것이고, 낙엽을 다 떨어뜨린 나무들은 새순 피울 준비를 할 것입니다.

움츠러들었던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년에 더욱 힘차게 뻗어 나가기 위해 잠시 쉬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고요하지만, 그 내면은 여느 계절과 다를 것 없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느리게 말이죠. 그런 기다림이 있기에 더 설레는 것이겠죠.

늦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지금껏 보았던 주변 풍경을 한번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보세요. 그렇다면 아마 제가 느낀 것처럼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느낌으로 보내는 늦가을의 마지막 속삭임을 들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 그 속삭임을 꼭 담아가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영호(아침고요수목원 식재디자인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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